나이 들어서 필요한 마음가짐.
엄마를 바라보며 느끼는 생각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결혼을 한 까닭에 아이들이 아직 결혼 적령기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요즘은 엄마를 옆에서 보며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떻게 사고방식을 고쳐가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빠와 반대되는 사람들을 만났고, 잘 사는 부부들을 공부했으며, 책도 많이 봤습니다.
부부간의 자존심 대결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주도권과는 상관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한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가정생활은 내가 꾸리면 됩니다. 남편과 잘 맞추면 되는 것인데 이게 올케와의 관계는 쉽지 않더군요.
올케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옆에서 잘하는 딸보다 며느리의 눈치를 더 보며, 딸들한테 일을 더 시키는 지를요.
스쳐 지나간 날들
남동생은 외교관입니다. 대학시절에 선교활동 갔다가 카자흐스탄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많이 예쁘더군요.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 허락 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난리를 쳐서 지금 올케와 결혼했습니다.
남동생이 호주로 발령이 났을 때, 2년간 저희 아이들이 남동생 집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중학교 시절에 아이들을 보내 영어를 잡고, 수학, 과학, 사회, 국어를 날려 먹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생활비는 아이 한명당 1000달러씩 2000달러를 매달 보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올케와 조카들은 방학 두 달 동안 한국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을 부수고 다시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이 있어, 엄마, 여동생, 남동생 가족, 저희 가족은 한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호주에서 아이들을 맡긴 신세를 갚아야 한다며 모든 집안일을 저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일을 하고 있었고 올케는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남동생의 아이들은 세 명이었고, 저희는 두 명이었기에 남동생네 빨래는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도 신세 진 건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아침,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 하고, 퇴근 후에는 빨래한 것을 올케 방 문 앞에 개서 놔두었습니다. 올케는 빨래를 개서 방문 앞에 놓을 때 항상 매일 얼굴에 팩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왜 며느리가 우선인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의 뒷바라지와 두 달간 뒷바라지는 천지 차이가 있겠지만 정말 찍소리 안 하고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남동생의 변화
남동생이 아이들이 너무 한국어를 못한다면서 한국으로 지원해 2년 동안 한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와이프는 아이들 셋을 키우느라 너무 고생했다고 엄청 감싸더군요.
일하면서, 집안일 하며, 아이들 공부를 신경 쓰는 저는 극성맞은 아줌마로 남동생 눈에 비쳤나 봅니다.
한국에 와서 외교부 직원들을 보며, 자신의 친구들 부부들을 보며 남동생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더군요.
너무 놀게만 하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며 공부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나 봅니다.
남동생이 한국에 와 있는 시기가 저희 큰 아이가 고3일 때라 한참 대학에 관심이 있을 때였습니다.
"누나, 외교부 직원들이랑 친구들은 모두 강남으로 이사 가서 아이들 교육시키더라. 부천에서 가능성이 있긴 할까?"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큰 아이가 서울대 시험을 쳤습니다. 물론 떨어졌습니다.
성균관대에 정시로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동생이 많이 놀라더군요. "부천에서도 이게 되네.."
그때부터 남동생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차피 2년 있으면 한국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국어 공부조차 하지 않고 버티기로 일관하더군요.
심지어 큰 조카는 장래 희망이 유튜브라면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로 간 이후에 말도 듣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자신의 큰아들이 너무 답답해서 올여름방학에는 한국으로 아이만 보낸다고 하더군요.
며느리와의 갈등
엄마는 손주가 온다고 하니 신이 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 직전에 막내도 같이 보낸다고 하더군요.
저는 엄마께 화를 냈습니다. "엄마가 밥을 어떻게 해먹이려고 올케는 애들만 둘을 보낸데?."
엄마는 올케에게 한국에 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가볍게 무시하더군요.
사실 목적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틈에 자신의 친정 부모님과 동생 가족을 초대하여 여행을 하기로 했나 봅니다.
자기 자식들은 한국으로 보내 늙은 시어머니가 밥 차리게 하고, 10년이상 젊은 지 친정 엄마와 뭘 하러 돌아다니는지 하루 종일 올케는 연락이 안 된다더군요. 남아있는 둘째는 알아서 밥을 해 먹거나 사 먹게 시키고.. 남동생도 올케의 행방을 모르더군요.
뭐 그건 그렇다고 쳤습니다.
저희 아이들을 보냈을 때 생활비가 당연했듯이 저는 올케에게 생활비를 요구했습니다. 한명당 100만 원씩 200만 원 보내라고요.
엄마께 생활비를 요구하라고 이야기 했더니 손주 먹이는데 할머니가 돈을 받는 게 좀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돈이 없는 게 매일 짜증이 난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제가 총대를 메고 입금하라고 지속해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먼저 생활비를 입금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버티다 주는 걸 보니 저와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 달째 되던 날 생활비를 보내라고 또 압박을 넣었습니다.
올케는 아이들 교육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배우자 잘 만나서 외국에서도 대접받고 사니 공부 안 해도 자신의 아이들도 잘 풀릴 거라고만 떠들고 있습니다.
교육비도 아까워합니다.
그렇게 아이들 키우면 바보 된다고 정신 좀 차리라고 하면 왜 자신의 아이가 잘 안 풀릴 거라고 저주하냐고 따져 묻습니다.
투자도 없이 아이들이 잘될 거라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어찌 되었던 생활비 압박 때문이었는지 엄마께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더군요.
" 제가 아이를 맡긴 건 당신인데, 왜 당신의 딸이 나한테 편지를 보내죠?" 라고요.
한국어가 서툴다고 하기에는 이곳에서만 산 생활이 족히 8년은 됩니다. 남들이 보면 한국인인 줄 압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 약자다
엄마께 물었습니다. 다른 집 부모들은 며느리를 잡지 딸은 좀 쉬게 놔두는데 엄마는 왜 반대냐고요.
엄마께서 그러시더군요. 나이가 들고 힘이 빠지면 남동생과 같이 살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래서 한국은 아들이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나 봅니다.
사실 그 잘난 아들은 외국에 있는 관계로 집안 대소사나 경조사 모두 제가 따라다녔는데 말입니다.
좀 섭섭했지만 그런 생각이라면 저도 엄마께 마음을 조금은 접기로 결심했습니다.
여하튼 엄마가 며느리가 버릇없이 굴고 이기적으로 굴어도 매번 봐주시는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같이 살려면 지금 밉보이면 안 된다.
그런데 엄마도 서서히 느끼시더군요.
저 며느리는 나를 모시고 살 생각이 전혀 없구나.
나이가 들면서 꼭 필요한 마음가짐은?
나이가 들면 자신감도 떨어지고 능력치도 떨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말씀하십니다. 다 큰 자식이 옆집에서 살아서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한다고요.
엄마는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아버지 신분이 어머니 신분이었고, 지금은 아들인가 봅니다.
아주 엄마의 자랑거리 외교관이십니다.
올케가 상식도 없이 저희 뒤통수를 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저 정도가 된 배경에는 엄마의 물렁한 태도, 뭐든 다 내주었던 아버지. 제 와이프라면 끔찍했던 남동생의 합동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하죠.
건강, 돈, 친구, 딸.. 뭐 이런 것들이라고요.
그런 것들은 기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은 끝까지 나만의 것이고 내가 스스로 책임진다는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같이 돈을 벌어도 집안일은 항상 제 차지였고 남편은 도와준다는 말로 일관했습니다.
나이 들어 둘이 재미있게 잘 살아야 하니 그냥 베푼다는 생각으로 집안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보니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이 가장 중요하다.
자식은 잘 크면 자랑거리지만 그렇다고 내가 기댈 존재도 아니고, 남편도 마찬가지다.
긴 인생 동반자는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이번 주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청소 깨끗이 안 합니다.
저는 지저분해서 하나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까요.
그 시간에 제 노후의 파이프라인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관한 공부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건강하고, 재미있고, 능력 있는 노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하게 되는 하루였습니다.